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스토 5세 (문단 편집) === 개혁 교황 === [[교황]]으로서 교회의 중앙행정기관을 지속적으로 재조직한 것은 그의 가장 놀라운 성과로 꼽힌다. 1586년 12월 3일 그는 [[추기경]] 수를 최대 70명으로 제한했다. 이 인원 수는 교황 [[요한 23세]]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또한 국무원을 개편하여, 추기경을 장관으로 하는 15개의 성을 신설했는데, 그중 6개 성은 세속 행정을 감독하고 나머지는 영적 문제들을 지도하게 했다. 이 조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조직 개편은 추기경단의 권력을 축소함으로써 교황과 공동 통치하려는 추기경들의 요구를 약화시켰다. 식스토는 이 조직을 성직매매와 성직 겸임 금지를 효과적으로 시행하는데 활용했다. [[가톨릭]] 개혁의 전환점은 1585년 12월 20일 주교들이 정기적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교구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교황청 정기 방문 규정을 다시 제정한 것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라 그는 불가타 성경 교정 위원회를 설립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주도해 1590년 5월 2일 교정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오류가 많아 식스토 사망 후 교정 작업이 다시 이루어졌다. 그는 [[예수회]]에 냉랭했던 반면 [[프란치스코회]]에는 관대하여,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를 교회학자로 선포했다. 식스토는 국제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국가를 세울 꿈을 꾸었다. 보다 실질적으로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는 막대한 원조를 약속하며 잉글랜드 침공을 부추겼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패전하자 원조를 거부했다. 그는 스페인 세력을 견제하며 가톨릭 강대국들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585년에는 파문당한 위그노와 나바라의 앙리에 맞서 펠리페를 원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황 임종 전에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펠리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일본, 명나라, 필리핀, 남아메리카 선교 활동을 장려했다. 식스토는 '강철 교황'이라고 불렸고, 가톨릭 재건을 위해 건축과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건축 사업을 통해 로마는 웅장한 바로크식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7대 순례 성당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주요 장소에 [[십자가]]를 꽂은 [[오벨리스크]]를 설치해 이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와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상수도 공사도 단행했으며, 라테라노 궁전을 재건축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지붕을 완성했다. 또한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고, 바티칸 인쇄소를 설립하여, 1587년에 칠십인역 성경을 출간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도 식스토 5세의 재임 당시 이전, 건립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 문서에도 나오듯이 건립 공사 과정에서 한 인부가 용감하게 나서서 오벨리스크가 무너질 위기를 막은 일이 있었는데, 이 인부는 이후 식스토 5세를 알현할 자격을 얻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